지금부터 정확히 만으로 90년 전인 1936년 2월 26일 새벽, 때늦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제국주의 일본의 수도 동경을 무대로 소위 2·26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우리민족의 시각에서 밖으로는 동아시아 역사의, 안으로는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꿔놓았다.
왜냐? 2·26 사건을 겪으며 아드레날린이 과다 분비돼 허파에 바람이 잔뜩 들어간 일본 군부는 1941년 12월 7일에 진주만의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해 태평양 전쟁으로 치달았다. 한국에서는 남로당 전력 탓에 군대 내에서 비주류 신세를 면하지 못했던 박정희가 그를 추종하는 소수의 정치군인들을 데리고 2·26 사건을 모방해 1961년 5월 16일 군사쿠테타를 일으켰다.
그런데 2·26 사건에는 세 가지 역설이 존재한다.
첫째로 수괴로 지목된 기타 잇키(北一輝)는 2월 26일 당일에는 사건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집에서 한창 쿨쿨 잠자고 있었다.
둘째로 쿠데타에 가담한 청년 장교들은 반란이 실패하자 자결하려 했는데 막상 상부로부터 할복 명령을 받자 되레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발버둥을 쳤다. (미시마 유키오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는 문장이 들어간 어느 소설인가에서 그들이 의연하게 죽어간 것처럼 새빨간 거짓말을 늘어놨다)
셋째로 반란 진압을 주도한 통제파 장성들은 쿠데타가 끝나자 쿠데타에 가담한 황도파 장교들이 주장했던 내용을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그 결과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차례로 한 발씩 원자폭탄 투하.
결론적으로, 윤석열은 이와 같은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조차 사전에 면밀히 조사하지 않고 허구한 날 술만 처마시다가 쿠데타를 일으킨 까닭에 쫄딱 망하고 말았다. 충암파가 아닌 ‘충남파’의 거두 공팔육의 오래갈 복기이다.
☞ 페이스북 계정에 써놓은 글을 기록 차원에서 갈무리함.
메시지버스 후원계좌 : 신한은행 389-02-165352 (예금주 : 공희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