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경선, 노무현의 경선, 황교안의 경선
한국 현대 정치사에는 역사의 진행 방향에 중대하고 결정적인 분수령으로 작용한 세 번의 경선이 있었다.
첫 번째 경선은 1970년 9월 29일의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였다.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를 내지 못한 까닭에 2차 결선 투표까지 치러진 이 날 경선에서 김대중(DJ) 의원이 김영삼(YS) 의원을 극적으로 제치고 신민당의 제7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김대중 신화의 시작이자 김종필(JP)까지 더하면 3김 정치 시대의 본격적 출발점이었다.
두 번째 경선은 2002년 3월 16일의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광주 경선이었다. 일반 시민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국민경선으로 치러진 이 날 경선에서 광주 민심은 영남 태생 노무현 후보를 선택함으로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노무현 돌풍, 즉 노풍이 전국을 강타하는 계기가 된 광주 지역 순회 경선은 김대중 정부가 정권 재창출에 성공하는 중요한 디딤돌이 됐다.
세 번째 경선은 2019년 2월 27일에 치러진 자유한국당 당대표 선출 경선이었다. 신임 당대표 선출을 목적으로 하는 전당대회 형식으로 펼쳐진 이 날의 경선전에서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누르고 보수 여당의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문제는 민심은 중도층으로의 외연 확장이 가능한 오세훈을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탄핵으로 악에 받친 당심은 태극기 부대의 일방적 지지를 등에 업은 황교안의 손을 들어줬다는 점이다. 전통적 양당 정치의 한 축으로 기능해온 한국의 거대 보수 정당이 이념적으로는 극우화의 광풍에, 행태적으로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부 숙청의 소용돌이에 걷잡을 수 없이 휘말린 통한의 운명적 순간이었다.
박근혜 탄핵에 격렬하게 반대했던 태극기 부대는 현재는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정당했다고 거세게 억지를 부리는 ‘윤 어게인’으로 이름만 살짝 달리한 상태다. 2019년 2월의 황교안은 “중도는 없다”며 보수 결집에 열중했다. 2026년 2월의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 또한 황교안과 매한가지로 중도는 실체가 없다고 주장하며 극우 성향의 강성 지지층의 뒤꽁무니만 쫓고 있다. 두 사람 간의 차이를 굳이 찾자면 황교안은 검사 생활을 오랫동안 했고, 장동혁은 판사 출신이라는 사실 정도다.
김영삼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역설하던 김대중을 대통령 선거 후보로 뽑음으로써 신민당은 청년층으로 지지세를 확실하게 넓혔다. 경남 김해에서 나고 자란 노무현을 대선 주자로 밀어 올린 새천년민주당은 영남권으로의 외연 확장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반면, 황교안을 당수로 당선시킨 탓으로 말미암아 자유한국당은 민심과는 더더욱 멀어지고 말았다.
황교안의 부정적 유산은 여기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한국의 보수 정당에 부정선거 음모론을 이식하는 주역이 되었다. 황교안을 매개체로 삼아 보수 정당에 침투한 부정선거 음모론의 바이러스는 윤석열에게도 치명적으로 감염되었다. 부정선거 음모론의 망상에 빠진 윤석열은 시대착오적 친위 군사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박근혜보다도 더 빨리 대통령직에서 쫓겨났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숫자에 앞서서 추세를 주목하라는 이야기를 흔히 한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기세 싸움인 데다 한국을 비롯한 대다수 국가의 유권자들은 상승세를 탄 후보자에게 자신의 표를 던지고 싶어 하는 ‘악대차 효과(Band Wagon Effect)’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이다.
윤석열 없는 윤석열 체제에서 오세훈의 공간은 없어
그렇다. 올해 6월 3일의 제9대 민선 서울시장 선거는 오세훈에게 뚜렷이 불리한 판세와 구도로 전개되고 있다. 심지어 몇몇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오세훈에 견주어 아직은 무명에 가까운 정원오 서울 성동구청장이 오 시장을 양자 대결 시에 오차범위 바깥에서 앞지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조차 하다. 오세훈 시장은 부동산 가격에 민감한 서울시 유권자들의 심리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는 기색이다. 자력으로는 선거에서 승리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모습인 셈이다.
정치인과 민중의 관계만 배와 물의 관계가 아니다. 후보자와 소속 정당의 관계 또한 역시 배와 물의 관계에 빗대질 수가 있다. 이는 정당이 자당의 후보자를 띄울 수도 있지만, 뒤집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장동혁 체제의 국민의힘은 오세훈을 띄울 의지도 능력도 없는 게 냉정하고 객관적인 현실이다. 대신에 장동혁 일행은 오세훈을 뒤집을 의지는 물론이고 능력까지 강력하게 보유했다. 황교안을 당대표로 선출할 당시와 대조하면 국민의힘 당원들의 인적 구조와 이념 지형은 훨씬 더 심각하게 우경화되었다. 30대 원외 인사 이준석을 당의 간판으로 세우는 약삭빠른 전략적 선택을 감행했던 당원들은 진즉에 조용히 사라졌거나 또는 당내 경선에 유권자로 참여할 의욕을 잃은 지 오래다.
그들이 남긴 빈자리에는 이른바 배신자를 응징하겠다는 비뚤어진 복수심에 사로잡힌 윤석열과 김건희 부부의 맹목적 추종자들이 조직적으로 들어섰다. 장동혁이 자랑하는 40만 명의 늘어난 당원들은 정상적 선거 과정을 통해 집권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국민의힘에 입당하지 않았다. 한동훈을 처단하고, 김종혁과 배현진을 제거하고, 오세훈을 응징하겠다는 일념으로 국민의힘에 입당 원서를 제출한 광신적 극보수 집단일 개연성이 높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고성국과 전한길 부류가 요란하게 선동해온 부정선거 음모론에 완전히 오염된 상황이다. 대한민국 땅에서 시행되는 모든 공직 선거는 부정선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을 저들이 선거 승리에 구태여 애면글면할 이유와 필요성은 전무하기 마련이다.
안팎으로 활로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 오세훈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윤석열의 해괴한 비상계엄과 장동혁의 엽기적인 ‘윤석열 사수’ 선언은 오세훈이 소중히 간직해왔을 5선 서울시장의 꿈을 진즉에 허공으로 산산이 흩어지게 만들었다. 이제 오 시장에게 남은 선택은 단 하나, 장동혁 체제의 국민의힘 자체와 아예 과감하게 절연함으로써 유력 혹은 잠재적 대권 주자로서의 위상이나마 지혜롭게 보존하는 길이다. 2019년에 황교안에게 무참하게 깨진 후에 오세훈은 극우화의 그릇된 물결에 드러내놓고 적극적으로 편승하지는 않았다. 마지 못해 살짝 발을 걸쳤을 뿐이었다.
국민의힘은 임박한 지방선거에서 비참하게 참패해도 당분간 바뀌지 않는다. 장동혁이 잠깐 쉬었다가 당대표로 복귀하든, 아니면 윤석열과 장동혁에 버금갈 벼락출세를 노리는 또 다른 기회주의적 정치 낭인이 당을 접수하든 윤석열 없는 윤석열 체제가 상당 기간 이어질 게 뻔하다.
윤석열 없는 윤석열 체제에서 오세훈의 공간과 기회는 없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건 무의미한 순장일 따름이다. 서울시장 선거 불출마 결단, 오세훈이 훗날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전략이라 하겠다. 제도권 정치인으로서의 처절한 생존투쟁에 나서야만 할 오세훈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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